1898년 제주 민란[각주:1]에서 나오는 해도진인설(海嶋眞人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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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란은 제주목사와 향리 세력이 제주 농민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억압적인 정책을 펴다가 화전민, 

특히 광청리(光淸里)에 거주하던 남학(南學)을 신봉하는 신자들 집단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농민 반란이다.



그 역사적 배경으로써 제주도에서는 19세기 들어와 민란이 자주 발생하였다. 

평안도 농민 전쟁의 영향으로 1813년 양제해(梁濟海)의 난이 일어났고, 1862년(철종 13)에 전국적으로 농민 항쟁이 터져 나왔는데, 이 때 제주도에서도 대규모의 농민 항쟁이 3차에 걸쳐 발생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1890년 하귀 사람 김지가 중심이 되었던 민란, 1891년 이완청이 중심이 된 민란 등이 연이어 일어났고, 1896년에는 신제 개혁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조선 말 거듭된 항쟁을 통해 제주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화전을 일구며 생활하던 대정현 광청리 주민들은 화전세(火田稅 )라는 명목의 세금이 부과되자, 1898년 2월 7일에 그 부당함을 시정해 달라고 소장(訴狀)을 제출한다. 


제주 목사는 모여든 농민들 앞에서는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뒤로 장두를 체포하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광청리 주민들, 특히 남학 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민란을 일으켰다. 


2월 26일 마을을 출발한 농민군은 3군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려 농민군을 소집하였고, 수천 명으로 불어난 농민군은 3월 1일 제주성으로 쳐들어갔다. 농민군은 목사 이병휘(李秉輝)를 내쫒고, 1896년도 민란 진압의 장본인 대정군수 채구석을 중상을 입히고, 향리들을 처단하였다. 





방성칠(房星七)을 비롯한 남학당 지도부자신들의 종교적 교리인 후천개벽의 사회를 실현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 )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모색하면서 유배와 있던 적객(謫客)을 지도부에 끌어 들이고, 조선 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대신 일본 정부와 교섭해서 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이를 위해 방성칠은 일본으로 직접 배를 타고 다녀오려고 하였으나 기상 악화로 출발이 연기되었다. 

그 사이에 양반 세력과 향리들이 조천을 중심으로 대항군을 조직하였다. 


3월 6일은 농민군에게 패하였지만, 다시 대항군을 조직하여 3월 16일 성을 탈환하고, 달아나는 방성칠을 애월 파군봉 앞에까지 추격하여 죽였다.


1898년 제주도 민란은 조선 말 제주도에서 여러 차례 발생하였던 농민 운동의 에너지를 조직적인 운동의 차원으로 끌어 올리고, 조세 개혁 요구에서 시작된 민란을 독자적인 정권 수립으로 나아가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념과 조직상의 한계와 토착 지배층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민란은 3년 뒤 이재수의 난 발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해도진인 = 해인 = 대두목 = 정도령 = 진인= 진주]



  1. 1898년 서귀포 지역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 [본문으로]
Posted by LAB-1000 키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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