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전경 : 공사(工事)

전경 공사 1장 12절 (김병욱에게 물은 뒤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자 신명 공사를 행하심) - 대순진리회 : 강증산 -

^___^ 2020. 6. 29. 23:51

전경 공사 1장 12절 (김병욱에게 물은 뒤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자 신명 공사를 행하심) - 대순진리회 : 강증산 -

 

증산이 주석하며 천지공사를 행했던 동곡약방

 

상제께서 김병욱에게 “이제 국세가 날로 기울어 정부는 매사를 외국인에게 의지하게 됨에 따라 당파가 분립하여 주의 주장을 달리하고 또는 일본과 친선을 맺고 또는 노국에 접근하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느냐”고 물으시니 그가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로 인하여 일본과 친함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상제께 대답하니 상제께서 “그대의 말이 과연 옳도다” 하시고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자 신명 공사를 행하셨도다.

 

http://daesoon.org/about/bible.book.php?cate=2&jang=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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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욱(金秉旭, 1874∼1938) 
김병욱(金秉旭, 1874∼1938)은 1903[癸卯]년부터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한 종도

김병욱은 전주 육군 진위대 하급 장교였다. 전주를 지키는 관군들은 10년 전인 1894[甲午]년에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동학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많은 사상자를 낸 적이 있었으므로 전봉준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이를 두고 상제님께서는 김병욱에게 “남은 어떻게 생각하든지 너는 전명숙(全明淑=전봉준)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너의 영귀(榮貴)에는 전명숙의 힘이 많으니라.”고 가르치셨다.

 

하루는 김병욱이 힘이 세어지게 해주는 차력약(借力藥)을 먹고자 했는데, 상제님께서는 “네가 약을 먹고 차력하여 태전(錢)04을 지겠느냐, 길품을 팔겠느냐, 난리를 치겠느냐, 그것은 사약(死藥)이니라!”고 깨우쳐 주시며 그런 생각을 버리게 하셨다.

 

903[癸卯]년 4월이 되자 김병욱은 남원으로 가서 세금을 거두는 직책을 맡았다. 그런데 얼마 후 김병욱은 박영효(朴泳孝)의 일당으로 연루되어 화를 당하게 되었다. 박영효는 1884년 혁명으로 급진 개화를 주도했다가(갑신정변) 실패하여 일본에 망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끝나고 일본에 의해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귀국하여 다시금 근대국가로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왕비를 시해하고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역모의 누명을 쓰고 1895년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박영효는 1898년 무렵 고종을 밀어내고 고종의 아들인 의화군(義和君, 1877∼1955)을 왕으로 옹립하려다가 실패했고, 1900년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는 밀약을 체결했다는 소문이 돌자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무능한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박영효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조정은 1903년 여름이 되자 박영효를 따르던 국내 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김병욱도 박영효의 일파로 알려져 있어서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8월에 포교들이 전주로 내려와 김병욱을 잡으려 하였으나, 당시 김병욱은 세금을 걷기 위해 남원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포교들은 다시 남원으로 향했는데 전주에서 남원까지는 동남쪽으로 불과 50㎞밖에 떨어지지 않은 짧은 거리였다. 그러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병욱은 자신에게 닥칠 화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포교들이 닥치기 얼마 전, 갑자기 상제님께서 남원에 있는 김병욱의 숙소로 가셔서 그가 모아 둔 세금을 숙소 주인에게 맡기게 하신 뒤, 가죽신 대신 짚신을 신게 하고 당신의 뒤를 따르게 하셨다. 김병욱은 영문도 모른 채 상제님의 명을 쫓았고, 해가 질 때까지 걸어 그의 선산 밑에 도착하였다. 아무 말씀이 없으시던 상제님께서 그제야 김병욱을 돌아보시며 선산의 묘형(墓形)을 물어보시니, 그는 “와우형(臥牛形)입니다.”고 아뢰었다. 상제님께서 “그러면 소 우는 소리를 들어야 참이 되리라.” 하시고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시니 산 아래서 “음메” 하는 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김병욱이 소 울음소리를 아뢰자 상제님께서는 “먼 데서 들리면 소용이 없나니라.” 하시고 계속 기다리시니 이상하게도 한 사람이 소를 몰고 묘 앞으로 지나가는데 갑자기 소가 크게 우는 소리를 내었다. 상제님께서 이를 보시고 “혈음(穴蔭)이 이미 동하였도다.” 하시며 자리를 떠서 그 산소의 재실로 내려가 그날 밤을 새우셨다.

  다음날 상제님께서 묘지기를 남원에 보내어 형세를 알아보게 하셨더니, 그제야 김병욱은 조정에서 포교들이 자신을 잡으러 남원에 들이닥쳤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 두려워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여자가 타는 가마를 구하게 하셔서 김병욱을 태우고 전주 상관(上關) 좁은 목으로 가셨다. 상제님께서는 그곳에서 김병욱을 서원규(徐元奎, 1855∼1935)의 집에 보내어 정세를 살피게 하셨다. 약국을 운영하던 서원규는 평소 김병욱과 절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김병욱을 보고 깜짝 놀라며 “그대가 어떻게 사지(死地)를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하려고 이런 위지(危地)에 들어섰느냐. 너무나 급한 화이기에 미쳐 연락할 새가 없었노라. 여러 친구와 그대의 가족들이 근심 걱정하는 중이니라.”고 말했다. 김병욱은 포교들이 전주를 떠나 남원으로 향한 때와 상제님께서 자기를 남원에서 데리고 나오신 때가 겨우 한나절 사이 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고는 상제님께서 하느님이심을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김병욱을 잡으러 남원에 갔던 포교들은 그를 찾지 못하고 전주에 되돌아와서 전주 군수에게 그의 소재지를 캐묻고 또 각처에 훈령을 내려 그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서원규의 약국에 숨어 지내게 된 김병욱은 그의 약국이 서천교(西川橋) 네거리의 번화한 곳에 있어서 무척 걱정하였다. 상제님께서 나중에 김병욱을 찾아오셔서 그에게 근심을 말 것을 이르셨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그를 데리고 왕래하시면서 길거리에서 수배 중인 그의 이름을 높이 부르시는 게 아닌가! 김병욱은 당황하여 모골이 송연하였으나 놀랍게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 자기 얼굴을 아는 사람들과 이곳저곳에서 마주쳤으나 신기하게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얼마 후 상제님께서는 김병욱을 장흥해(張興海)의 집으로 옮기시고 그곳에서 석 달 동안 머물게 하셨다. 석 달이 지나자 상제님께서는 김병욱에게 이제 마음을 놓으라고 이르셨는데, 과연 그때 러일전쟁이 임박하여 일본군이 나라에 들어오고 박영효를 따르던 당원들에 대한 혐의도 사라졌으며 김병욱도 지명수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훗날 상제님께서는 류찬명(柳明)과 김자현(金自賢) 두 종도에게 각각 10만 명에게 포덕하라고 이르실 때, 김병욱의 액을 태을주로 풀었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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